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 나는 행복으로 할래.


난 어려서부터 우리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어. 여러 공주들의 이야기, 왕들의 이야기, 내 또래의 다양한 이야기.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마스크 없이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어. 마스크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다니! 그건 마치 속옷도 입지 않은 채 군중 앞에서 100m 달리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내 방에는 형형색색의 마스크가 진열되어 있어. 은은한 미소의 마스크, 활짝 웃는 입꼬리가 예쁜 마스크, 눈웃음 짓는 마스크, 황당한 표정의 마스크, 기분이 상한 마스크, 울상을 짓고 있는 마스크, 어떤 표정인지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의 마스크,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는 마스크.

이 세상의 모든 마스크를 모으는 게 내 목표야! 다양한 표정을 지었으면 좋겠거든. 아, 마스크 디자이너마다 조금씩 표정에 차이가 생겨. 그래서 눈웃음 마스크는 벌써 3개나 있어.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 나는 행복으로 할래.” 여담이지만, 난 앨리스가 좋아! 


어김없이 그날도 내 기분을 정했어. 오랜 고민 끝에 눈웃음을 짓고 있는 마스크로 골랐지. 정말이지 섬세한 눈꼬리가 아주 인상적인 마스크야. 마스크를 쓰고 현관을 나섰어. 자전거를 타고 강가를 지나는데 물가 아주 가까이에 한 사람이 앉아있는 거야. 물에 뭐가 있나 싶어 물가를 바라보았는데 웬걸. 맨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니겠어? 나는 너무 놀라 넘어지고 말았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넘어졌지. 자전거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어. 

내가 잘못 본 건가.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려봐도 그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모습이었어. 진심이야. 내가 장담해. 비록 반사된 모습이었지만 난 그와 눈도 마주쳤다고! 심지어 내게 웃어 보였어. 아무 표정도 없었는데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눈이 반짝 빛이 났다니까. 

난 그날 이후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잠에 들 때마다 그의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잠뿐이겠어? 일상생활도 불가능했지. 들숨에 그의 뒷모습이, 날숨에 그의 맨 얼굴이 보였으니까. 내 얼굴은 수시로 달아올랐지. 한 가지 다행인 건, 마스크에 가려 아무도 몰랐다는 거야. 

못 볼 걸 봤지. 암, 그랬고 말고. 하지만 동시에 궁금했어. 그의 맨 얼굴을 볼 때 내가 느꼈던 해방감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그처럼 마스크를 벗고 싶다, 뭐 이런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부러웠고, 답답하던 게 뻥 뚫린 기분이었어. 


그의 모습을 차차 잊어갈 때쯤, 난 기차를 타고 있었지. 난 반달 모양의 눈웃음 마스크를 골라 썼어. 다른 표정의 마스크도 두어 개 챙겼지. 기차가 서서히 멈추고 난 내 가방을 챙겨 기차에서 내렸어. 역 벤치에 그가 앉아있었어. 그가 앉아있었다고! 그날 이후로 자전거를 타고 몇 번이나 그 강변을 지나갔는데도 마주치지 못했던 그를, 이렇게 다시 보다니. 그는 마스크를 벗고 있었어. 맨 얼굴이었다고! 또! 외간 남자의 얼굴을 또 마주하다니! 엄마는 내게 늘 마스크를 쓰라고 하셨는데…….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도 절대 마스크를 벗지 말라고 하셨는데 말이야! 

이번에는 눈 마주치기 전에 내가 고개를 돌렸어. 하지만 힐끔힐끔 보며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 나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벤치에 앉아 책을 폈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책을 거꾸로 들고 있었던 것도 같아. 기차가 세 번 지나가고 한 남자가 내렸어. 그 남자는 내리자마자 마스크를 벗었지. 둘은 맨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어. 자연스럽고 싱그러운 웃음이었어. 내 얼굴은 또다시 붉게 달아올랐지. 아무리 마스크를 꼈다 해도 기차 엔진보다 큰 소리로 쿵쿵대는 내 심장소리를 숨길 수는 없었어. 

나는 그들을 따라갔어.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마치 닌자처럼 말이야! 그림자처럼 은밀하고 위대하게 움직였지. 그들은 계속해서 걸었어. 그런데 사람이 있는 곳은 꼭 피하는 거야. 분명 뭔가 걸리는 거지! 자기들도 부끄러운 거야!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건 알겠더라고. 

한참을 따라갔어. 걷고 걷고 또 걸었지. 다리가 아파지려던 참에 그들은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어. 나도 그들을 따라 들어갔지. 삐거덕 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갔어.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는 게 보이더라고. 나도 따라갔지. 계단을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갔어. 얼마나 내려왔을까. 드디어 문 하나가 보이는 거야. 그들은 이미 들어가고 없었어. 들어갈지 말지 내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게. 심호흡을 한 서른 번은 한 것 같아. 큰 용기를 냈어. 문을 열었지. 

내가 사는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어. 있을 건 다 있었고 불법적인 걸 반입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 동일해 보였어. 하지만 한 가지가 달랐지. 지하에 있는 이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지 않았어. 마스크의 존재도 모른다는 듯이 그들은 웃고 떠들고 울고 화냈어. 앨리스의 말이 생각났지. “내 기분은 내가 정해.”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마스크를 벗었어. 마스크를 벗으니 발가벗은 기분이더군. 사람들 앞에서 마스크를 벗은 게 거의 20년 만이었어. 수치스러웠지만 동시에 해방감이 들었어. 상쾌한 기분이랄까. 그런 건 마스크로 나오지 않는데 말이야. 난 내 맞은편의 거울로 걸어갔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더군. 설레면서도 두려운 표정이 복합적으로 드러나 있었지. 맨몸으로 풀밭을 달리기하는 기분이랄까. 해본 적이 없어 상상만 할 뿐이지만 난 그날을 잊지 못해. 모두가 그렇게 자연스러운, 날 것의 표정을 짓고 있다니.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이 뒤엉킨 표정이 가능하다니. 엄마는 내게 늘 마스크 쓸 것을 강조했지만 사실 엄마도 바라고 있었던 거야. 답답한 마스크 없이 밖을 나가고 싶었던 거지. 


난 여전히 마스크를 골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달 눈꼬리 마스크로 말이야. 대신 난 상상하기 시작했지. 가면 속에 가려진 저들의 “진짜” 표정은 무엇일까. 그들의 진짜 감정은, 진짜 기분은 어떤 걸까. 내 감정에도 더 솔직해지기로 했어. 가면을 벗고 진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늘었고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담아두기로 했어. 그래서 난 매일 사진을 찍어. 내 맨 얼굴을. 거울에 마주친 나의 눈을, 내 표정을 바라보며 오늘도 난 이야기해.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 나는 행복으로 할래.”


해파리


피서객으로 붐비는 모래사장에 너도나도 덕지덕지 선크림을 바르고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든다. 일분이라도 빨리 들어가서 놀고 싶은 아이들과 아이의 연약한 피부를 위해 꼼꼼히 선크림을 발라주는 부모님의 모습을 본다. 파라솔 아래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과 선오일을 바르고 햇볕에 살을 태우는 사람들을 본다. 서로의 말소리는 뭉치고 뭉쳐 하나의 거대한 소음으로 다가온다. 

나는 어려서부터 바다에 자주 가지 않았다. 바닷바람을 쐬러 다녀온 적은 많았어도 바닷물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 흔한 해파리조차 본 적이 없었고 바닷물의 짠맛도 알지 못했다. 내가 바다를 접하는 방식은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전부였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 <니모를 찾아서>를 다시 보게 되었다. 니모의 생김새와 로그라인밖에 기억나지 않는 상태에서 다시 보니 꽤 재미있었다. 내가 인상적이게 봤던 것은 해파리가 나오는 장면이었다. 니모를 찾으러 떠난 도리와 멀린은 해류를 따라 이동하는 거북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해파리를 만나게 된다. 아주 작은 해파리를 보고 귀여워하느라 정신 팔린 도리는 결국 멀린과 함께 해파리 대군에 갇히게 된다. 도리는 해파리의 머리를 밟고 가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지만 결국 둘 모두 해파리에 쏘이고 만다. 

여기서 나는 해파리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해파리는 왜 대군으로 다닐까? 해파리는 왜 사람들을 공격할까? 해파리는 무엇을 먹고 살까? 어떤 검색 엔진이든 ‘해파리’를 검색하면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해파리의 좋은 점을 끈질기게 찾았고 결론적으로, 해파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해파리는 최소한의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뇌, 심장, 호흡기관이 없으며 신경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종종 잠을 자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는데, 이는 뇌는 수면을 통해 휴식할 수 있다는 지금의 연구와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뇌는 내 두통을, 심장은 스트레스로 인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게 뛰는 심작 박동을, 호흡은 답답함에 숨쉬기가 힘든 상황을 말한다. 뇌도 심장도 호흡기관도 없다면 얼마나 편할까. 오로지 신경에 의한 본능적 반응만 해도 된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고 생각했다. 

해파리는 헤엄치는 힘이 약해 수면에 떠다니거나 해류를 따라 이동한다. 몸통을 수축하며 움직인다. 움직임을 멈추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다 촉수에 닿은 작은 생명체를 먹으며 산다. 해파리의 움직임은 인간의 심장박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바닷속에서 유유자적하는 해파리의 모습은 내게 이상적인 모습으로 비쳤다. 그의 움직임이 심리적 안정감까지 가져다준다니.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모습이다. 해파리는 태평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몸통을 수없이 움직인다. 가라앉을 때 그들의 태도 역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잠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그들은 하던 일을 깔끔히 그만두고 가라앉는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에너지를 충분히 보충하면 다시 몸통을 열심히 움직여 떠오른다. 

해파리의 기특한 점으로 스스로 빛을 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다. 해파리는 먹이를 찾거나 위협을 가하기 위해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이다. 언젠가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별이다’라는 주제로 MT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이 주제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빛을 낼 줄 안다는 게 얼마나 기특한 부분인가. 나는 스스로 빛나고 있는지, 나의 존재가 빛을 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희미한 빛이더라도 누군가는 내 빛을 보며 길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또 다른 기특한 점으로는 재생력에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딘가가 잘리면 그 부분을 다시 재생시키기 위해 다른 부분을 수축시킨다. 상처를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해파리의 모습이 어쩐지 성숙해 보였다. 우리는 넘어지고 다치고 까지고 베여도 앞만 바라본다. 아프다고 쉬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상처는 곪고 곪아서 손쓸 수 없게 된다. 작은 상처일 때 충분한 회복 시간을 갖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태도일 것이다. 

내 꿈은 해파리가 되는 것이다. 해파리는 큰 욕심이 없이 유유자적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 또한 스스로 빛을 내고 무한히 재생한다. 또, 이들은 대군을 형성하여 서로에게 힘이 된다. 나는 지상의 해파리가 되어 누구보다 열심히 살며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회복하고 재생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가고자 한다. 작품설명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 나는 행복으로 할래.모두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세상. 이 세상의 모든 표정을 갖고 싶어 하는 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어느 날 가면을 쓰지 않은 한 남자를 만나면서 가면 속 가려진 얼굴의 의미, 표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우리의 진심어린 표정과 감정을 억누르고 숨기지 말자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해파리다음 생은 해파리로 태어나야지. 왜 다음 생이야? 이번 생에서도 해파리처럼 살아보자!


작품설명

해파리

다음 생은 해파리로 태어나야지. 왜 다음 생이야? 이번 생에서도 해파리처럼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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